가끔 TV 채널을 무심코 돌리다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미 다 알고, 대사까지 외울 정도인데도 이상하게 다시 빠져들게 되는 그런 영화들 말입니다. 제게는 '친구', '웰컴 투 동막골', 그리고 '디워'가 꼭 그런 작품들입니다. 누군가에겐 가슴 뜨거운 청춘의 기록으로, 또 누군가에겐 따뜻한 웃음과 눈물로, 다른 이에겐 뜨거운 논쟁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이 영화들입니다. 서로 장르도, 색깔도, 심지어 사람들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달랐지만, 모두 제 청춘의 한복판을 지나갔던 잊을 수 없는 작품들입니다. 오늘은 왜 이 영화들이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불현듯 우리의 기억을 붙잡는지, 제 마음대로 떠드는 수다 한번 시작해 볼까 합니다.
친구 – 우정과 배신, 그리고 세월의 무게
마흔이라는 나이를 넘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가끔씩은 선명하게, 또 어떨 때는 희미하게 지난날의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퇴근 후 소파에 몸을 묻고 멍하니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친 영화 ‘친구’. 2001년,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그 영화가 저의 잊고 있던 기억 한 조각을 불쑥 끄집어냈습니다. 어느덧 20년도 더 훌쩍 지난 영화지만, 장동건과 유오성의 껄렁한 모습과 귓가를 때리는 구수한 부산 사투리는 여전히 생생합니다. “네가 가라, 하와이”,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같은 명대사들은 이제 ‘아재 개그’처럼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서툴렀던 젊음,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는 1970년대와 80년대 격동의 부산을 배경으로 네 친구, 준석, 동수, 상택, 중호의 우정과 갈등, 그리고 엇갈린 운명을 그려냅니다. 곽경택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있어 그랬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 속 그들의 모습에서 자꾸만 제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함께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던 학창 시절. 교실 창밖으로 쏟아지던 햇살 아래,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고 싸우기도 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동무하며 낄낄대던 우리들의 모습. 영화는 바로 그 시절의 우리를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과 선택의 기로에서 네 친구의 우정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조직 폭력배의 길을 걷게 된 준석과 동수, 그리고 평범한 학생으로 남은 상택과 중호. “우린 친구 아이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들의 길은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만 갑니다. 어릴 적엔 그저 준석의 의리와 동수의 반항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다시 본 ‘친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택’과 ‘책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이었습니다. 다른 길을 걸어간 친구를 끝내 품지 못했던 준석의 안타까운 선택, 그리고 열등감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동수의 모습은 비단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소중한 무언가를 잃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내 젊음의 한 부분을, 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아픔일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마지막, 상택의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흐르던 OST ‘In Memorium’은 지금 들어도 가슴 한편을 아리게 합니다. 비극으로 끝나버린 친구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깡패 영화’가 아닌, 서툴고 아팠지만 그래서 더 눈부셨던 한 세대의 청춘에 대한 진혼곡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밤, 오랜만에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봐야겠습니다. “잘 지내나?” 그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비록 각자의 삶에 치여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 한편에 서로를 추억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웰컴 투 동막골 – 전쟁 속 순수와 평화의 섬
요즘 들어 부쩍 세상이 참 시끄럽고 팍팍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편을 나누고, 잘잘못을 따지고,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소식들이 넘쳐납니다. 이럴 때면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합니다. 이 모든 소음이 닿지 않는 곳, 서로 미워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영화 중 '웰컴 투 동막골'이 있습니다. 2005년, 벌써 20년 가까이 된 영화지만, 지금 이 순간에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제 기억 속 '웰컴 투 동막골'은 전쟁 영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어른들을 위한 가장 따뜻한 동화였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6.25 전쟁이 한창인 때이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막골'은 전쟁의 포화가 비껴간, 아니 전쟁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마을입니다. 바로 그곳에 길을 잃은 국군, 인민군, 그리고 추락한 미군 조종사까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눠야 할 이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처음의 팽팽한 긴장감과 불신은 순박하다 못해 엉뚱하기까지 한 동막골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서히 녹아내립니다. 특히 강혜정 배우가 연기했던 '여일'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행동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수류탄 핀을 뽑아 던져 옥수수 더미를 팝콘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은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일 겁니다. 죽음의 무기가 한바탕 웃음을 주는 간식거리로 변하는 순간, 이념과 증오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유쾌하게 보여주는 최고의 연출이었습니다. 멧돼지를 잡기 위해 '적'이었던 이들이 힘을 합치는 모습과 어설픈 협동 작전 속에서 피어나는 동지애는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가슴 한편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적'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내니 그 안에는 그저 나와 똑같이 먹고, 웃고,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을 뿐입니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본 '웰컴 투 동막골'은 제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적대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른 채, 혹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너무 쉽게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비극 속에서도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선함과 순수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운 영상과 마음을 울리는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완벽한 호흡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기적 같은 판타지입니다. 팍팍한 현실에 마음 둘 곳 없다 느껴질 때, 사람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질 때, 동화 같은 위로가 필요하시다면 '웰컴 투 동막골'을 다시 한번 꺼내 보시는 건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 마음속에도 저마다의 '동막골' 하나쯤은 가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디워 –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도전과 한계
2007년 여름, 기억하십니까? 대한민국 전체가 한 편의 영화 때문에 들끓었던 그 뜨거웠던 날들을 말입니다. 인터넷 게시판마다, 술자리에서마다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한국 영화의 위대한 도전'이라며 찬사를 보냈고, 다른 한쪽에서는 '스토리가 이게 뭐냐'며 냉혹한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심형래 감독의 '디워(D-War)'가 있었습니다. 어느덧 4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 그때의 소동을 돌이켜보면 '참 뜨거웠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저 역시 친구들과 디워를 두고 꽤나 진지한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디워'의 스토리는 단순했습니다. 전생으로 얽힌 남녀와 세상을 파괴하려는 이무기의 대결.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구조였고, 중간중간 어색한 대사들은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영화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고, '영화의 기본은 스토리'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디워'에 그토록 열광했을까요? 제 생각에 그건 아마 스크린을 압도하는 '장면의 힘' 때문이었을 겁니다. LA 도심 한복판을 휘젓고 다니는 거대한 이무기 '부라퀴'의 모습, 고층 빌딩을 뱀처럼 휘감고 포효하는 장면은 당시 한국 영화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각적 충격이었습니다. "이걸 정말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놀라움과 함께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코미디언 심형래가 오랜 시간 자신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서사, 그리고 '충무로의 왕따'를 자처하며 할리우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영화의 부족한 서사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디워'를 보는 것은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감행한 한 사람의 꿈을 응원하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디워'를 다시 평가해 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 영화는 '잘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의미 있는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토리의 완성도는 아쉬웠을지언정,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한국 영화계에 심어주었습니다. '디워'가 뿌린 도전의 씨앗이 있었기에, 이후 '신과 함께', '승리호'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더 높은 완성도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디워'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이무기가 스크린을 가득 메웠을 때 느꼈던 전율, 그리고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한 사람의 도전에 보냈던 순수한 응원의 마음은 여전히 제 가슴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디워'는 우리에게 영화 한 편 그 이상의 의미를 남긴, 한국 영화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문제작이자 화제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결론
이렇게 세 편의 영화 이야기를 연달아하고 나니, 제20대와 30대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뜨거웠던 청춘의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며 가슴을 저리게 했던 '친구', 팍팍한 현실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어른들의 동화 '웰컴 투 동막골', 그리고 온 나라를 '애국'과 '완성도'라는 키워드로 들썩이게 했던 뜨거운 도전 '디워'까지입니다. 장르도, 메시지도, 우리에게 남긴 감정도 제각각이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우리 기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시대를 함께 통과해 온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영화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논쟁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추억의 영화'가 있습니까? 이번 주말에는 잠시 복잡한 세상 시름을 내려놓고, 먼지 쌓인 DVD나 VOD 목록에서 잊고 있던 나만의 명작 한 편 꺼내보시는 건 어떤 것 같습니까? 아마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과 감정들이 함께 되살아나는, 꽤 근사한 시간 여행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