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바빠 극장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유독 기억에 남는 해가 있습니다. 제게는 2013년과 2014년이 그랬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고, 또 의미 있는 한국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제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세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충격적인 상상력으로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던 '설국열차', 숨 막히는 연기 대결에 손에 땀을 쥐게 한 '관상', 그리고 배꼽 잡는 웃음과 따뜻한 눈물을 동시에 안겨준 '수상한 그녀'까지입니다. 계급투쟁, 역사, 가족 판타지. 이렇게 놓고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신기하게도 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천만'에 가까운 관객들을 불러 모으며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때 왜 우리가 이 영화들에 그토록 열광했는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떤 느낌일지, 오랜만에 추억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설국열차 – 폐쇄된 세계의 은유
2013년, 봉준호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가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는 소식은 개봉 전부터 엄청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죠. 바로 영화 '설국열차' 이야기입니다. 빙하기가 닥친 미래, 살아남은 인류가 끝없이 달리는 기차 한 대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설정부터가 굉장히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캡틴 아메리카'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크리스 에반스와 틸다 스윈튼 같은 배우들이 송강호, 고아성과 함께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설 때의 그 찜찜하고도 서늘했던 기분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이건 단순히 치고받는 액션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억압받는 맨 뒤쪽 꼬리칸부터 호의호식하는 맨 앞쪽 머리칸까지, 달리는 기차 한 대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꼬리칸의 유일한 식량이었던 새까만 '단백질 블록'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의 충격, 그리고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주하게 되는 기차 안의 기상천외한 풍경들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계급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처음 볼 때는 꼬리칸의 반란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그저 숨 막히는 긴장감과 결말의 반전을 좇아가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두 번째, 세 번째 관람부터 서서히 드러납니다. 바로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은 봉준호 감독의 집요한 디테일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보면, 인물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와 스쳐 지나가는 표정에 숨겨진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기괴한 틀니를 끼고 연설하던 틸다 스윈튼의 광기 어린 눈빛이나, 문 하나를 열 때마다 다른 세상을 마주하는 듯한 정교한 세트 디자인은 '설국열차'라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엄청난 현실감을 불어넣습니다. '설국열차'는 보고 나서 유쾌하고 후련한 영화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닫힌 문을 열 것인가, 그 안에서 안주할 것인가?'와 같은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화려한 볼거리 속에 이토록 날카로운 메시지를 숨겨놓은, 역시 봉준호 감독답다는 생각이 드는 명작입니다.
관상 – 운명과 정치의 교차점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이 대사 한 마디면 설명이 끝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13년, 대한민국에 '관상'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스크린을 압도했던 영화, 바로 한재림 감독의 '관상'입니다. 40대 중반을 살아가는 저에게 '역사'란 학창 시절의 따분한 암기 과목이었다가, 나이가 들수록 곱씹어볼 이야깃거리가 많은 흥미로운 분야로 다가오곤 합니다. 특히 '관상'은 조선 초 가장 드라마틱했던 사건인 계유정난을 '관상'이라는 신선한 소재로 풀어내어, 딱딱한 역사가 아닌 한 편의 쫄깃한 심리 스릴러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나라 최고의 관상가 김내경(송강호)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만 보고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은 역적의 가문이라는 굴레에 갇혀 아들과 함께 산속에 칩거해 살아갑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우리는 단종, 수양대군, 김종서 등 역사책 속 인물들의 '얼굴'과 그 안에 숨겨진 '욕망'을 엿봅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 대결입니다. 사람 좋고 능청스러운 모습부터 시대의 비극에 휘말려 고뇌하는 모습까지 완벽하게 소화한 송강호는 물론, 김혜수, 백윤식, 조정석, 이종석 등 어느 한 명도 허투루 쓰이지 않는 명품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관상'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바로 수양대군을 연기한 배우 이정재입니다. 첫 등장 씬에서 이리처럼 탐욕스럽고 잔인한 '늑대의 상'으로 등장할 때의 그 서늘한 카리스마는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그의 등장은 영화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버리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습니다.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천재 관상가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그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대사 하나하나에 담긴 은유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운명'을 읽는 자가 결국 '운명'에 저항하지 못하고 파도에 휩쓸려 가는 모습은 "과연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권력의 무상함과 그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한 편의 잘 짜인 비극. 영화가 끝난 뒤에도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이정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오래도록 남는, 짙은 여운을 가진 명작입니다.
수상한 그녀 – 웃음과 눈물의 환생 이야기
"내가 니 할머니다!" 2014년 겨울, 걸쭉한 할머니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소리치던 스무 살 아가씨 하나가 대한민국을 웃기고 울렸습니다. 바로 황동혁 감독의 영화 '수상한 그녀'의 주인공, 오두리(심은경)였습니다. 40대 남자가 되고 보니, '우리 엄마'라는 존재는 늘 한결같이 그 자리에 계셨던 분으로만 기억됩니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가슴 설레던 스무 살 처녀 시절이, 못다 이룬 꿈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왜 그리도 못 하고 살았을까 싶습니다. 영화 '수상한 그녀'는 바로 그 잊고 있던 당연한 사실을 유쾌한 상상력으로 풀어내며 제 뒤통수를 제대로 때린 작품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구박만 받던 칠순의 욕쟁이 할머니 오말순(나문희). 어느 날 '청춘 사진관'에서 영정 사진을 찍고 나오다 홀린 듯 스무 살, '오드리 헵번'처럼 고왔던 시절의 얼굴로 돌아가게 됩니다. 젊은 몸으로 돌아간 그녀는 '오두리'라는 이름으로, 평생 가슴에 묻어두었던 '가수'의 꿈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갑니다. 이 영화의 9할은 배우 심은경의 하드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겉모습은 뽀얀 피부의 아가씨인데, 말투와 걸음걸이, 그리고 능청스러운 표정은 영락없는 우리네 할머니입니다. 그 기가 막힌 부조화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정말이지 배꼽을 잡게 만들죠. 특히 손주 녀석의 밴드에 들어가 구성진 목소리로 '나성에 가면'을 부르는 장면은 지금 다시 봐도 명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저 웃기기만 했다면, 천만 가까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을 겁니다. 영화는 젊음을 되찾은 할머니의 좌충우돌 소동을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엄마의 삶, 그 속에 숨겨진 상처와 후회를 마주하게 될 때쯤이면, 웃음기는 사라지고 어느새 코끝이 찡해져 옵니다.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심은경의 원맨쇼에 정신없이 웃었다면, 마흔이 넘어 다시 본 '수상한 그녀'는 다른 질문을 던지더군요. '만약 나에게 저런 기회가 온다면, 나는 과거로 돌아갈까?'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선택을 합니다. 주름지고 병든 지금의 모습일지라도, 그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괜히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싶어 집니다. 잊고 지냈던 부모님의 빛나던 청춘에 대해, 그리고 지금 내 곁에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참 따뜻하고 고마운 영화입니다.
결론
이렇게 세 편의 영화 이야기를 하고 나니, 짧은 시간 동안 참 여러 세상을 여행하고 온 기분입니다. 기차 안의 작은 세상에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설국열차',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슴을 졸이게 했던 '관상', 그리고 잊고 있던 가족의 사랑에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던 '수상한 그녀'까지입니다. 사회 비판, 역사 드라마, 가족 코미디. 이름만 들으면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어쩌면 이처럼 익숙한 세상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말, 잠시 잊고 지냈던 나만의 '인생 영화'로 즐거운 여행 한번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분명 처음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