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난 뒤, 며칠 동안 그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냥 '재미있다'는 감상평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마음 어딘가를 묵직하게 건드리는 그런 영화들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타짜', '화려한 휴가', 그리고 '아저씨'는 제게 바로 그런 작품들입니다. 욕망이 들끓는 화투판의 세계, 우리가 외면했던 아픈 역사, 그리고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까지. 장르도, 배경도, 색깔도 전혀 다르지만, 이 세 영화는 모두 관객의 심장을 제대로 후벼 파는 강렬한 힘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제 기억 속에 유독 진한 자국을 남긴 이 '센' 영화 세 편에 대한 수다를 한번 떨어볼까 합니다.
타짜: 한국식 범죄 오락물의 정점
"아수라발발타... 아수라발발타..." 나이가 마흔을 넘긴 아재들에게 '인생 영화' 몇 편을 꼽으라면, 아마 열에 아홉은 이 영화를 빼놓지 않을 겁니다. 2006년 추석, 대한민국을 그야말로 '화투'의 세계로 빠뜨렸던 최동훈 감독의 '타짜'입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영화 속 대사들은 여전히 인터넷 밈으로, 술자리 유머로 살아 숨 쉬며 우리 곁을 맴돌고 있죠. 가구 공장에서 일하던 순박한 청년 '고니'(조승우)가 우연히 발을 들인 화려하고도 잔혹한 노름판. 그곳에서 전설적인 스승 '평경장'(백윤식)을 만나고, 매혹적인 설계자 '정마담'(김혜수)과 얽히며 타짜의 길로 들어서는 이야기는, 허영만 화백의 탄탄한 원작 위에 최동훈 감독 특유의 맛깔난 연출이 더해져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영화의 진짜 힘은 살아 숨 쉬는 캐릭터와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맛'에 있습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예림이, 그 패 봐봐. 혹시 장이야?" 등등.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주옥같은 대사들은 영화의 리듬을 만들고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타짜'를 이야기할 때,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죠. 바로 도박판의 악귀, '아귀'(김윤석)입니다. 영화 후반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그가 내뿜는 광기와 카리스마는 스크린을 찢고 나올 듯 생생합니다. 특히 마지막 운명의 한 판에서 고니를 향해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라며 으르렁거릴 때의 그 서늘함은, 이 영화가 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범죄 영화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화려한 기술과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사건들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다시 본 '타짜'는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는 한 편의 서글픈 우화(寓話)처럼 다가옵니다. 돈과 욕망을 좇아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 그들의 마지막은 결국 "원래 이 바닥엔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어"라는 평경장의 대사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화려한 쇼가 끝나고 난 뒤의 씁쓸함. '타짜'는 그 짜릿함과 허무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손에 쥔 그 패가, 과연 당신 인생의 '장'이 맞냐고 말입니다.
화려한 휴가: 비극의 역사와 인간의 선택
2007년 여름, 저는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보통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시시콜콜한 농담이라도 나누기 마련인데, 그날은 극장 안의 모든 관객이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바로 1980년 5월, 광주의 그날을 스크린 위에 옮겨온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였습니다. '화려한 휴가(華麗한 休暇)'. 계엄군의 작전명이었다는 이 역설적인 제목부터가 이미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비극의 무게를 짐작게 합니다. 40대 중반인 저에게 1980년 5월은 역사책 속 몇 줄의 기록으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서너 줄의 건조한 텍스트 안에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물과 절규, 그리고 뜨거운 용기가 담겨 있었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영화는 어떤 거창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택시기사 민우(김상경), 그가 짝사랑하는 씩씩한 간호사 신애(이요원), 그리고 그들의 이웃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던 우리의 이웃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더 아팠습니다. 금남로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데이트, 평화로운 일상이 총칼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그 참혹한 과정은, 단순한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니라 40여 년 전 이 땅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비극이라는 사실에 몇 번이고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영화 속 주인공이 외치던 이 대사는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그날을 살아냈던 모든 광주 시민들의 피맺힌 절규였을 겁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저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주며,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본 '화려한 휴가'는, 우리가 누리는 이 평범한 오늘이 얼마나 많은 분들의 희생과 용기 위에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감사함과 죄송함으로 다가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젊은 세대가 있다면,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진 분들이 있다면, 꼭 한번 시간을 내어 보시길 권합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저씨: 고독한 영웅의 액션 드라마
"금니는 받는다. 금니 빼고 모조리 씹어 먹어 줄게." 2010년 여름, 대한민국은 한 과묵한 '아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옆집에 살아도 무슨 일을 하는지, 이름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 그 남자가, 오직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의 모든 것을 응원했습니다. 바로 원빈 주연, 이정범 감독의 영화 '아저씨'입니다. 40대 중반을 살아가는 저에게 '아저씨'라는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짠하기까지 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저씨'라는 단어에 '멋짐', '압도적', '처절함'이라는 전혀 다른 수식어를 붙여버렸습니다. 아마 배우 원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두운 과거를 숨긴 채 전당포를 운영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던 전직 특수요원 차태식(원빈). 그의 유일한 친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옆집 소녀 소미(김새론)뿐입니다. 그 소미가 범죄 조직에 납치되자, 그는 잠들어 있던 모든 능력을 깨워 소녀를 되찾기 위한 외로운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야말로 '작품'입니다. 그냥 치고받는 수준이 아니라, 실전 무술을 바탕으로 한 빠르고 간결하며, 그래서 더 잔혹하고 현실적인 액션은 이전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충격과 쾌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소굴에서 수십 명을 상대로 홀로 싸우는 장면은, 분노와 절박함, 그리고 슬픔까지 담아낸 명장면 중의 명장면이죠. 직접 머리를 깎으며 스스로 세상과의 마지막 끈을 잘라내는 장면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단순히 화려한 액션 영화였다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인생 영화'로 꼽히진 않았을 겁니다. 영화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소미를 구하고 싶다'는 태식의 절박한 마음입니다. 그에게 소미는 단순한 이웃집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를 용서하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내일을 보고 살지? 나는 오늘만 보고 산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내가 보여줄게." 처음 봤을 때는 숨 막히는 액션과 원빈의 얼굴에 넋을 잃었다면, 마흔이 넘어 다시 본 '아저씨'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원하는 처절한 사랑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그런 '아저씨'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많은 팬들이 원빈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지만, 어쩌면 그는 이 '아저씨' 한 편만으로도 대한민국 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고 진하게 새긴 것이 아닐까요. 아직도 "이거 방탄유리야, 개새끼야!"라는 대사가 귓가에 맴도는 밤입니다.
결론
이렇게 '타짜'부터 '화려한 휴가', 그리고 '아저씨'까지. 제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강렬한 영화들의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지('타짜'),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준 위대한 용기가 얼마나 뜨거운지('화려한 휴가'), 그리고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헌신이 얼마나 처절할 수 있는지('아저씨')... 참 신기하죠? 장르는 다 다른데, 세 편 모두 보고 나면 마음에 아주 깊은 자국을 남기는 '센 영화'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마음에 강렬한 펀치 한 방을 날려주는 영화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잊고 있던 감정을 깨우고, 지금의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듭니다. 이번 주말, 잊고 지냈던 이 강렬한 이야기들 속으로 다시 한번 빠져보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아마 10여 년 전과는 또 다른, 더욱 깊어진 울림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