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단순히 '재미있다'는 감상평을 넘어,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남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즐거움을 넘어선 무언가, 때로는 뜨거운 분노와 먹먹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영화들이 있죠. 제게는 택시운전사, 서울의 봄, 그리고 파묘 이 세 편이 바로 그런 작품들입니다. 이 영화들은 단순한 시대극이 아닙니다. 영화를 통해 당시 그 시간 속으로 데려가, 잊고 있던 것이나 외면하고 싶었던 역사를 되새기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울의 봄: 답답함에 주먹을 쥐게 만들다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고, 답답하고, 또 무력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2023년 겨울, 대한민국을 그야말로 뜨겁게 달궜던 영화 '서울의 봄'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참 기이한 체험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79년 12월 12일, 그날 밤의 결과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제발, 제발 이겨라." 영화관을 가득 채운 건 아마 똑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성공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끝까지 군인의 명예와 원칙을 지키려 저항했던 참군인들을 향한 응원, 그리고 결국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절망과 분노. 한동안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했던 건, 아마 스크린 속 인물들의 그 답답함과 울분이 우리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가 대단한 건, 교과서 속 한 줄로만 존재했던 역사를 심장 뛰는 현실로 소환해 냈다는 점입니다. 저 같은 40대에게는 어렴풋이 기억하던 현대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시간이었고, 젊은 세대에게는 어렵고 딱딱한 역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다가갔습니다. 머리털까지 밀어가며 탐욕스러운 권력욕을 드러낸 전두광(황정민)과,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려 했던 이태신(정우성)의 팽팽한 대립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 그 시대의 공기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던 이유. '서울의 봄'은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 위에 서 있는지를 다시 한번 심장에 새겨준 영화였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꼭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파묘: 땅속 깊이 묻힌 상흔을 파헤치다
2024년 상반기, '험한 것'이 나온다며 극장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파묘'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저 '잘 만든 오컬트 영화 한 편 나왔나 보다' 하고 큰 기대 없이 극장을 찾았습니다. 풍수사와 장의사, 무당이라는 독특한 전문가 조합이 조상의 묘를 이장하며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 소재부터가 흥미로웠습니다. 영화 초반은 그야말로 찝찝한 미스터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최민식, 유해진, 김고은, 이도현 네 배우가 보여주는 '전문가 포스'는 정말 대단했고, 묫자리를 파내려 갈수록 엄습해 오는 불길한 기운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딱 거기까지였다면, '파묘'는 그저 잘 만든 공포 스릴러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귀신 이야기를 넘어, 관객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진짜 공포는 '험한 것'의 정체가, 우리 땅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박아놓은 식민 시대의 쇠말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시작됩니다. 무서운 혼령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100년 가까이 청산되지 않은 채 우리 발밑에 남아있는 역사의 저주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파묘'는 단순한 오컬트 영화에서 우리 민족의 한을 파헤치는 거대한 서사로 바뀝니다. 땅을 파헤쳐 원혼을 달래고, 마침내 그 쇠침을 뽑아내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공포를 넘어 짜릿한 해방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파묘'는 한국형 오컬트 장르가 어떻게 우리의 역사와 만나 독창적인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준, 아주 영리하고 힘 있는 영화였습니다. 혹시 아직 안 보셨다면, 단순한 공포 영화가 아니니 꼭 한번 경험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택시 운전사: 평범한 눈으로 목격한 시대의 비극
2017년 여름,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한동안 마음이 참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슬픔이나 분노라기보다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부채감'에 가까웠습니다. 바로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 운전사'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광주? 돈만 주면 가지!"를 외치던, 딸의 월세를 걱정하는 지극히 평범한 서울 택시 기사 김만섭(송강호)의 시선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의 옆자리에 함께 앉아, 아무것도 모른 채 1980년 5월의 광주로 향하게 되죠. 정치도, 이념도 모르는 평범한 소시민의 눈을 통해 목격한 그날의 참상은 그래서 더 아프고 처절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영화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도왔던 택시 기사 김사복 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도 오랫동안 두 분의 이름이 마음속을 맴돌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기록하고, 또 그 기록을 세상 밖으로 실어 나르려 했던 그들의 용기와 사명감. 그리고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얼굴.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딸의 손을 잡고 울먹이던 김만섭의 마지막 모습은,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일 겁니다. 우리는 그날의 진실을 위해 용기를 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빚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택시 운전사'는 단순히 아픈 역사를 재현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과 양심 위에 세워졌는지를 알려주는 고마운 영화입니다.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로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겁니다.
결론
이렇게 서울의 봄, 파묘, 택시 운전사 세 편의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 스릴러, 오컬트 호러, 휴먼 드라마. 장르도, 시대도, 이야기 방식도 전혀 다르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역사'라는 씨실에 '인간'이라는 날실을 엮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죠. 스크린을 통해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우리를 연결하고, '나 혼자만의 감상'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힘. 이것이야말로 세 편의 영화가 천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아직 이 영화들을 보지 않으셨다면, 혹은 다시 볼까 망설이고 계신다면, 꼭 한번 시간을 내어 보시길 바랍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우리가 나아갈 내일을 생각하게 하는 아주 묵직하고도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