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주변 사람들과 "너도 그 영화 봤어?" 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천만 관객'을 넘은 영화들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한동안 우리 사회 전체의 '이야깃거리'가 되곤 합니다.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낸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천만 영화 중에서도, 유독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세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베테랑, 7번 방의 선물, 그리고 부산행입니다. 액션, 휴먼 드라마, 재난 스릴러. 장르도, 웃음과 눈물의 코드도 전혀 다른 이 영화들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그토록 뜨겁게 만들었는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영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 기억을 다시 한번 꺼내볼까 합니다.
베테랑 – 통쾌한 정의감과 현실풍자
2015년 여름, 기억하십니까? 유독 무더웠던 그해 여름, 우리 속을 시원하게 식혀줬던 영화가 한 편 있었습니다. 극장을 나서는데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쾌함이었습니다. 바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입니다. 뉴스를 보다 보면 답답하고 화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상식 밖의 행동을 저지르는 걸 볼 때면 더 그렇습니다. '베테랑'은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악행을 저지르는 재벌 3세와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 세상. 이토록 익숙해서 씁쓸한 현실에, 영화는 '서도철'(황정민)이라는 정말 꼴통 같은 형사 하나를 툭 던져 놓습니다. 그가 외치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대사는 단순히 멋진 영화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들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끈질긴 수사를 내 일처럼 응원했던 것 같습니다. 서도철이라는 캐릭터가 빛날 수 있었던 건, 아마 유아인 배우가 연기한 '조태오'라는 역대급 악역 덕분일 겁니다. 비릿한 미소와 함께 "어이가 없네"라고 읊조리던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죠. '어떻게 저렇게까지 망나니일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어딘가 현실에 있을 법한 모습이라 더 화가 났습니다. 그의 악행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악역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도 있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베테랑'은 신나는 액션과 유해진, 오달수 등 명품 배우들의 티키타카가 만들어내는 유머가 일품인 오락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날카로움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나아졌을지 생각해 봅니다. '베테랑'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아마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여전히 서도철 같은 진짜 '베테랑'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7번 방의 선물 – 웃음과 눈물이 함께한 감동 휴먼드라마
2013년, 벌써 10년도 더 된 영화입니다. 당시 극장에서 '7번 방의 선물'을 보고 나오면서 딱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웃기다 울려도 되나?' 하고 말입니다. 포스터만 봤을 땐 그저 유쾌한 코미디인 줄만 알았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온통 조용한 훌쩍임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초반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6살 지능을 가진 아빠 '용구'(류승룡)와 그의 전부인 어린 딸 '예승'(갈소원). "예승이 콩 먹어요, 냠냠" 같은 소소한 대사를 주고받으며 세상 가장 행복해 보이던 부녀의 모습은 절로 아빠 미소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흉악범들만 모인 7번 방 교도소에 용구가 들어가고, 흉악범 동료들이 예승이를 그곳에 몰래 들여오기 위해 벌이는 기상천외한 작전들은 정말 배를 잡고 웃게 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이 유쾌한 웃음 뒤에 얼마나 큰 눈물이 숨어있는지 모릅니다. 영화는 유쾌한 웃음의 한가운데로 너무나 아프고 억울한 현실을 훅 밀어 넣습니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씻을 수 없는 누명을 써야 했던 용구의 모습, 그리고 아빠를 위해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치던 어린 예승이의 모습은 관객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법정 장면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도 코끝이 찡해집니다. 아마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그 장면에서 눈물을 참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겁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깨닫게 됩니다. 이건 그저 눈물만 짜내는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7번 방의 선물'은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주며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사랑을 통해, 우리 사회의 편견과 사법 제도의 허점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남긴 감동은 더 길고 깊게 우리 마음에 남았을 겁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영화를 찾으신다면, 이만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네요.
부산행 – 한국형 좀비 장르의 새로운 시작
2016년 여름, 기억하십니까? '한국형 좀비 영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원래 피 튀고 정신없이 달려드는 좀비 장르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장르를 우리가 과연 잘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약간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부산행'은 그런 저의 선입견을 첫 장면부터 아주 시원하게 박살 내버렸습니다. '부산행'의 가장 기발한 점은 바로 KTX 열차라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공간을 주 무대로 삼았다는 겁니다. 명절이면 늘 타고 내리던 그 좁고 긴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투라니. 피할 곳 하나 없이 맹렬하게 달려드는 좀비 떼의 모습은, 러닝타임 내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극강의 서스펜스를 선사했습니다. 아마 '부산행'을 보고 한동안 KTX 타기가 꺼려졌던 분들도 꽤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저 잘 만든 좀비 액션물이었다면, 천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을 겁니다. '부산행'의 진짜 공포는 좀비가 아니라, 극한의 재난 상황 속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이었습니다. 자신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 위기 앞에서 제대로 된 대처 하나 못하는 무능한 모습들은 스크린 속 좀비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영화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좀비 떼를 맨몸으로 막아서던 '상화'(마동석)의 모습은 답답한 상황 속 유일한 사이다였습니다. 특히 이기적인 펀드매니저였던 '석우'(공유)가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며 진짜 '아빠'로 변해가는 과정은, 같은 아빠로서 정말 가슴이 아프면서도 뭉클했습니다. 마지막 그의 선택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부산행'은 한국 영화계에 'K-좀비'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짜릿한 장르적 쾌감은 물론, '진정한 재난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이기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까지 완벽하게 담아냈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이만한 웰메이드 재난 영화는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결론: 웃음, 눈물, 긴장… 모든 감정이 담긴 천만 명작들
이렇게 베테랑, 7번 방의 선물, 부산행을 다시 돌아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장르도, 이야기도 제각각이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관객들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온몸으로' 먼저 반응하게 만들었다는 엄청난 공통점이 있습니다. 베테랑의 서도철을 보며 내 일인 양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통쾌함, 7번 방의 선물 속 용구와 예승이를 보며 내 가족 같아 하염없이 눈물 흘렸던 먹먹함, 그리고 부산행의 생존자들과 함께 KTX 복도를 달리듯 심장이 쫄깃해졌던 그 긴장감까지. 아마 이 영화들이 천만이라는 거대한 숫자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렇게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다시 보기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찡해지는 걸 보면, 정말 잘 만든 이야기의 힘은 시간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통쾌함, 슬픔, 긴장감. 각기 다른 색깔로 우리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이 세 편의 영화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국민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